이야기 하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사람 여기 있소’
나는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싫다는 소리를 하지 못했다. 특히 굳이 하고 싶지 않은 부탁도 거절을 하지 못해서 억지로 마지못해 할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이젠 내 마음과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 해야지’하고 다짐을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서 같은 상황을 만들곤 했다. 어릴 적에 내 이름보다 ‘아무개 선생님의 딸’로 더 자주 불리면서 남에게는 친절하거나 모범적으로 행동해야 아빠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 것이라고 늘 머릿속에 있었다. 어쩌면 일부러라도 잘해서 내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인정 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태도는 결혼 후에도, 내가 선교사로 지원하고 훈련 받을 때에도 이어졌다.
선교지로 나가기 전, 선교회에서 6 개월 동안의 다른 가정들과 함께 공동체 훈련을 받으면서 나는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그것은 옆집에 세 살과 한 살의 딸 둘이 있는 선교사 훈련생 가족 때문이었다. 공동체 생활이다 보니 함께 나누어 사용해야 하는 물건들이 있었는데, 세탁기가 없었던 옆집은 두 집 사이의 베란다에 놓은 우리 세탁기를 사용했다. 옆집은 세탁기안에
세탁물을 넣어 놓고 한참 동안 세탁을 하지 않아 나는 필요할 때마다 바로 세탁을 하지 못했다. 나의 성격 탓에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세탁물이 비워지기를 기다렸다가 빨래를 했다. 어떤 때는 똥이 조금 묻어 있는 기저귀가 보여 기분이 언짢기도 했다. 그리고 세 살인 아이는 우리 집으로 노크도 없이 수시로 놀러 왔는데, 식사 시간이 되어도 가지 않는 아이에게 가끔은 밥을 먹이기도 했지만, 마냥 내버려 두는 아이의 엄마가 예의와 눈치가 없어 보이기만 했다.
어느 날은 아이가 우리 집에 와서 탁상시계를 바닥에 놓쳐서 망가졌는데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아이에게 큰 소리로 혼내더니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선교사 훈련을 받으면서 매일 해야 하는 과제보다 옆집으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와 점점 아이와 엄마가 미워지는 마음 때문에 괴로웠다. 도저히 이런 마음으로 훈련을 받고 선교지로 나가는 것이 옮은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상담 교수님께 도움을 요청 드렸다. 무작정 참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아니면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한 건지 알고 싶었다. 교수님의 대답은, 참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참지 말라는 것은 말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말을 하지 마라?’ 교수님께서는 말을 하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만 가능하다고 하셨다.
‘형제, 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선교지의 현지인들을 어떻게 사랑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진 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아이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 집에 와서는 밥도 먹고,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정리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리고 세탁기안에는 여전히 빨래가 담겨 있었다. 변함없는 옆집 가정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도록 기다리는 것은 무척 어려운 숙제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해가 뜨거웠던 어느 날, 아이를 업고 물건을 들고 집으로 오는 엄마의 모습이 내 눈에 확~ 들어왔다. 등에 업혀있는 아이가 울고 뒤에 따라오는 아이도 동시에 우는데 너무나 지쳐 보이는 엄마의 얼굴에, 갑자기 내 가슴이 찡해졌다. 교회를 가기 위해 한솔이를 업고 버스 안에서 잠든 예슬이를 안은 채, 무거웠던 기저귀 가방을 들고 다니던 내 모습이 떠 올랐다.
내 마음에 변화가 생겼다. 세탁기 안에 옆집 빨래가 있으면 빈 양동이에 빨래를 꺼내 놓고 우리 빨래를 먼저 한 다음 다시 옆집 빨래를 넣어 두었다. 식사 때 옆집 아이가 있으면 전보다 기쁘게 밥을 먹였다. 사랑하는 마음은 아니더라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대신 옆집의 상황을 이해하며 도와주면서 조금씩 편안한 마음으로 남은 훈련을 받게 되었다.
어느 날 한솔이가 울면서 왔다. “엄마, 누나가 다른 동생들에게는 잘해주는데, 나에게는 못해줘요”, “기도해봐, 누나 바뀌게 해달라고!”
며칠 후 한솔이가 다시 왔다. “엄마, 기도해도 누나가 바뀌지 않아요”,”그럼 네가 바뀌게 해달라고 기도해봐”, 그 이후로 한솔이는 그 일로 찾아오지 않았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에게서나 배운다. 부족한 사람에게서는 부족함을, 넘치는 사람에게서는 넘침을 배운다는데.. 나는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적당함을 배우고 싶다.
이야기 둘,
선교지에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이야기 그림 성경에 삽입될 그림들의
수정을 섬기려 한국에서 온 자매와
우리와 일상생활을 같이 하고 싶다고
온 청년은 3개월 동안 아마존에서 함께
동거동락을 했고, 인천과 서울에 있는
교회 청년들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온 지인들은 바나와 부족과 강변
사람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는 시간이 되었다. 바나와 마을에서는 강선교사가 번역 한 성경
이야기를 전하고 말씀에 대한 그림에 인디오들과 여러 가지 색연필로 색칠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좋아하는 색을 골라 칠하기도 하고, 옆에 있는 친구들과 똑같이 칠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색을 칠해보는 어른들은 그림 전면에 한가지 색으로만 칠해서 다른 색으로도 표현하도록 도와주어 동심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상파울로의 교회에서 보내 온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문구가 새겨진 옷은 인디오들에게 특별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예배를 기다리는 강변마을들을 다닐 때에는 보통 일주일 정도 배를 타는데, 해먹을 배에 걸어 잠을 잔다. 큰 배를 만나면 여유 있게 간격을 두고 해먹을 걸어 편하게 지낼 수 있지만 작은 배를 만날 때에는 위 아래로 해먹을 이층으로 걸어 잠을 자기도 하는데, 청년들에게는 불편함 속에서도 감사를 만나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마약 갱신원과 감옥 그리고 현지인 교회에서도 미니 올림픽과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되어 감사한 시간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순간순간마다 나누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더 큰 감동과 은혜의 기쁨을 남겨주셨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약 5:13)’
이야기 셋,
바나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번역하면서, 우리는 교회의 재건축을 하기 위해 오랫동안 소망하며 기도해왔다. 비가 올 때는 구멍 난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고, 찢어진 창문에서는 박쥐와 벌레들이 들어왔다. 특히 벌레로 갉아진 나무 바닥은 아이들의 발이 빠질 정도로 위험해졌다.
강선교사가 말씀을 전한 후에 기도 제목을 나누자, 청년 아리파가 말하기 시작했다.
“베드로(강선교사)와 번역한 ‘요시야’ 왕이
생각납니다. 소년 요시야는 겨우 여덟 살에
유다의 왕이 되었어요. 이전에는 여러 나쁜
왕들이 나라를 다스렸지만, 요시야는 하나님을
사랑했어요. 예루살렘 성전은 낡아서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백성들이 그 곳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은지 이미 오래되었어요. 요시야 왕은 성전을
예쁘게 고치어 백성들이 다시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해 주고 싶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과 제사장이 성전을 수리하던 어느 날, 제사장은 벽
속에 숨겨진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했어요. 제사장은 그 두루마리를 왕에게 보여 주었어요.
바로 성경책이었어요. 요시야 왕은 기뻐서 백성들을 모두 불러 하나님의 율법 책을 큰 소리로 읽어 주었어요. ‘언제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꼭 지키겠어요’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쁘게 약속을 다짐했어요. 바나와 마을의 교회는 ‘베드로(강선교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하려는 교회 수리를 우리도 우리의 손으로 도와야 합니다!”
강선교사와 번역한 열왕기하 22-23 장의 말씀을 비유로 멋지게 말한 아리파는 바나와 인디오들의 마음에 강한 도전을 주고, 강선교사와 내 마음에 기쁨의 눈물을 선물로 주었다.
<아이들에게 찬양을 가르치는 모습과 도시에서 주민증을 만들고 기뻐하는 아리파>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빌 4:9)’
바나와 마을에서는 배로 이틀 정도 거리의 가까운 따뿌아와 까누따마에서 자재들을 구입하기로 했다. 어떤 것들은 더 멀리 ‘라브리아’라는 소도시까지 나가야 필요한 것들을 구입 할 수 있었다. 큰 도시에서는 쉽게 구하고 저렴하게 살 수 있는 것들이 유통하는 과정에서 비용의 차이가 많이 났다.
강선교사는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을 힘들게 오르는 어른들을 위해서 바닥을 낮추고, 건물벽은 나무 대신 벽돌과 시멘트로 채우고, 색을 예쁘게 칠하는 수리로 간단하게 계획했다. 그리고
가능하면 기존의 나무들을 재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다시 사용하기에는 떼어낸 나무들이 너무 낡아서, 모든 자재를 새로 구입해서 새 성전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배에서부터 바나와 마을까지 무거운 물건들을 옮기는건 무척 힘이 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바나와 청년들은 물론 아이들까지 땀을 흘려 도와가며 즐겁게 옮기고,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 올려놓는 모습에 보람을 느끼며 힘을 얻기도 했다.
일층으로 만들려고 했었던 교회는 기도 중에, 이층의 기도실을 만들게 되었다. 든든한 믿음의 기초를 세우고 하나님과 기도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치며 함께 기도하고 싶었다.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자 제일 높은 건물이 될 교회는 이층으로 올라가면 망고나무 너머로 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 좋아서 더 많이 기도를 하게 되리라는 꿈이 그려진다. 우기가 시작되면서 큰 배에서 작은 배로 물건을 옮겨 나르는 것이 어려워지고 교회 공사가 조금씩 늦춰지고 있지만, 남은 내부시설과 마무리를 위해 우리는 더 많은 기도를 하게 된다.
이야기 넷,
오랜만에 엄마랑 통화를 하고 나니, 유난히 돌아가신 아빠생각이 났다. 젊은 날의 고생은 돈을 주고서라도 사서 하는 게 좋다며 초등학교 때 신문 배달을 권하셨었다. 힘든 경험 속에서 많은 생각과 배움이 많다며 자전거도 사주셨지만, 잠이 많았고 일찍 일어날 의욕이 나에겐 없었다. 신문을 배달한 적은 없었지만, 젊은 날의 고생이 좋다는 아빠의 말씀은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선교지에 있는 우리를 보는 사람들마다 고생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사랑이 없었다면, 지난 시간들이 고난의 시간이었다고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울고 싶어도 참았던 날들, 오래도록 외로웠던 시간들을 버텨내며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내가 감당하고 있는 고생이 얼마만큼이 되어야 도망치고 싶을 만큼의 고달픔인지를 몰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수 없이 기다리며, 하루하루가 버거워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힘들었던 날들은 아빠가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고 깨닫고 그리고 내가 낮아지는 기적의 시간들이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0)’
그래서 멀리 떨어져 있는 막내 딸을 걱정하시는 아빠와 통화 할 때마다 다양한 삶 속에서 씩씩하게 지내는 딸과 정글 학교에서 용감하고 멋지게 지내는 아이들의 이야기로 한숨을 덜게 해 드릴 수 있었다.
“제가 누구예요! 아빠 딸인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며 용기와 위로를 주시던
진실하고 따뜻한 아빠의 목소리가 그리워 눈물이
흐른다. <정글학교에서 아이들이 준비한 강선교사의 생일>
하늘을 바라본다. “제가 누구예요! 아버지 딸인데!” 내 마음을 아시고 내가 말하지 않은 부분도 감찰하시는 아버지께서 계시니 참 든든하다.
오늘도 하늘의 아버지가 보시기에 ‘참 잘했다’라고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다.
“우리가 길을 떠날 때는 아브라함처럼 갈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자” 강선교사는 말한다. 앞장서서 가는 남편 등뒤를 따라가면서 질문이 많아진다.
‘보이지 않은 길을 어떻게 가자는 거지? 그래도 아주 조금은 보여야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오늘도 보이지 않은 길을 남편과 함께 떠난다.
2019년 3월에
뜨거운 길을 떠나는 심순주드림